"Hi, I'm korean boy."
내가 살면서 제일 처음 "실사용했던" 영어 문장이다. 요즘은 엄청 어린 아이들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던데, 저때 나는 이미 고등학생이었다.
언어를 공부하는 재미를 알다
이 초라한 문장 안에 담겨 있던 건 한국 밖의 세계에 대한 압축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저 한 문장으로 시작해서 외국인 친구도 많이 사귀고, 수능 영어도 특별한 공부 없이 잘 보고, 나름 명문이었던 대학에서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교양 과목을 (재밌어서) 많이 들은 것도 모자라 전부 A+를 받고, 해외로 혼자 배낭여행도 다녀오고, 5년 동안 유학생활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언어 공부라는 것을 억지로 한 적이 없고, 항상 재밌어서 했다. 저 한 문장이 그 여정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도, 그 스마트폰에서 돌아가는 앱도 워낙 많이 발달했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은 스마트폰이 정말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사교성이 극도로 없던 나는 (지금도 사교성이 너무 없어서 여전히 음성보다는 활자를 통한 소통이 편하고 익숙하다) 외로움을 달랠 방법으로 어느 날 문득 "외국인이랑 대화를 해 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때 인터넷 검색창에 외국인 친구 사귀기를 검색하면 제일 많이 언급되던 사이트가 "Interpals"였다. 지금 봐도 이름 참 잘 지었다. International Penpals, Interpals.
내가 우울증 관련한 글을 쓰면서도 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사람을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비관이다. 그리고 비관은 멍청함이 아닌 불필요하게 활성화된 똑똑함이다. 너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나머지, "어차피 내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빨리 서고, 어차피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게 비관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사실, 무언가를 일단 하기만 하면 세상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선물을 줄 텐데, 내가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해서 아무것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마, 비관.
지금 이 나이의 나는 더 이상 외국인 친구를 만드려고 열을 올리지도, 적극적으로 그들을 만나지도 않는다. 이전보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알 것 같고, 세상을 조금 더 알 것 같고, 그래서 허무맹랑한 꿈은 꾸려고 해도 꿔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꿈이 있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했고, 지금 이 나이에선 만들 수 없는 향기 가득한 추억도 거의 다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
북유럽으로의 배낭여행
처음 배낭여행을 갔던 건 만 20살에, 북유럽으로였다.
오슬로(노르웨이) - 베르겐(노르웨이) - 오슬로(노르웨이) - 스톡홀름(스웨덴) - 예테보리(스웨덴) - 오르후스(덴마크) - 뮌헨(독일) - 헬싱키(핀란드) 순으로 여행했다. 아니 잠깐, 이 순서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오슬로에서도, 베르겐에서도, 스톡홀름에서도, 예테보리에서도, 그리고 오르후스, 헬싱키에서도 만날 그 나라 친구들이 있었다. 전부 Interpals에서 사귄 친구들이었다. 유일하게 독일에서만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었는데, 그래서인가 독일에서의 3일은 정말 지루했다. 사교성은 없는데 맥주는 왠지 마셔야 할 것 같고, 그런데 원래 술은 안 마시고, 초라하게 맥주 하나에 소시지 하나 시켜서 쓸쓸하게 앉아서 쩝쩝대다가 결국 맥주를 남기고 일어났던 기억이 있다. 독일에서는 숙소도 왠지 일부러 아시안들은 아시안들끼리만 모아 놓은 것 같았고, 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을 때도 표정이 썩 좋지 좋았고, 이래저래 좋은 기억이 없는데 그 기억의 근원은 그곳에서 만날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 가라앉아 있던 내 기분이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노르웨이에서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누군가가 "뭐 도와줄까?" 하면서 다가오길래 이 나라는 천사들의 나라인가? 했던 당시의 기억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다음 편에서는 내 개인적인 여행 썰과, (당시) Interpals 사이트가 갖고 있던 특성들에 대해 얘기를 좀 더 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