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자극적인 표현으로 글의 문을 열어보겠음. 외모라는 건 일종의 공공재임. 예를 들어 ‘키스’를 보자. 누군가와 키스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그만큼 특별해야 함. 아무나와 키스를 할 수는 없음. 그러니까, 키스는 공공재가 아님. 특정한 관계에서만 허용되는, 관계의 영향을 씨게 받는 아주 특수한 행위인 거임.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외모 자체는 누구나 ‘시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소비할 수 있음. 내가 문 밖을 나서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관찰될 수밖에 없음. 이 사실이 외모라는 거에 굉장히 특별한 지위를 부여함. 관계에 상관없이 모두가 같은 것을 관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인간의 공공재적인 성격을 가진 유일한 부분, 그게 바로 외모임. 그러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밖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논리적인 처사인 거임.
그럼 지금부터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외모라는 게 울적함이 되어서 돌아올 수 있는 건지를 살펴보겠음.
인간에겐 기본적인 미적 감각이라는 게 있음. 선과 색, 그들의 배치에 따라 무엇이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감각임. 여기엔 어느 정도의 개인차도 있지만, 분명히 높은 확률로 많은 사람에게 공통되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있음. 예를 들어, 누군가는 새빨간 하늘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예쁘다고 느끼겠지.
이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떻게 생긴 외모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평면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런 위치에서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은 이런 인상을 자아내는 외모를 가졌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식으로 꽤나 입체적으로 인식되곤 함. 예를 들어, "길에서 울고 있는 여학생에게 어떤 남학생이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었다"는 스토리가 아름답기 위한 남자의 외모와, "길에서 울고 있는 여학생에게 어떤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는 스토리가 아름답기 위한 할아버지의 외모에 대한 기준은 다르다는 거임. 다소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이 관찰자에게 가장 극적으로 와닿기 위해서는 이 스토리를 구성하는 인물들의 외모가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는, 많은 사람들의 꽤 공통된 기준이 있음.
이렇게 외모를 입체적으로 제일 많이 고려하는 사람들이 바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사람들임. 같은 대사를 하더라도, 그 장면이 일단 아름다워야 사람들 마음에 스며들 수 있지 않겠음? 그 아름다움을 자아내기에 최적의 외모 및 아우라를 가진 사람을 뽑는 거임.
우리가 외모로 인해 느끼는 울적함은 바로 여기서 옴. 우리는 배우가 아니지만, 가수가 아니지만, 심지어는 정치인도 아니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스토리를 겪는데 그 스토리가 내 외모 때문에 더 아름다워질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닐까 두려운 거임. 사랑하는 상황에선 그냥 로맨틱하게 사랑만 했으면 좋겠지, 갑자기 넓은 이마가 발라당 까져서 상대가 화들짝 놀라는 스토리는 없었으면 좋겠고, 어쩌다 흘리는 눈물은 마치 온갖 그간의 감정이 농축되어 있는 아름다운 감정의 액기스 한 방울처럼 느껴졌으면 좋겠지, 자기 감정 컨트롤 못하고 "질질 짜는" 모양새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좋은 의도로 어떤 말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고, 관계가 더 우호적으로 변하는 아름다운 얘기였으면 좋겠지, 이건 또 뭐야 싶은 어느 평범한 인간 13의 괜한 참견이나 오지랖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런 두려움이 있는 거임.
내가 숨 쉬듯 겪는 나의 라이프 스토리가 내 외모로 인해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완성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불편하고 두려운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