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사람은 음식에 이끌리고, 배부른 사람은 음식을 밀어내지. 이끌림이라는 건 절대로, 절대적이지 않음. 그냥 그게, 혹은 그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임. 모든 것은 관계의 문제임. 

그래서 내가 '지금 당장', '내 주변에' 내 매력(이끄는 힘)을 어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곧 '나'의 가치를 의미하진 않음. 왜냐면 앞에서 말했듯, 무언가의 실용적 가치는 결국 굶주림제공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거지, 그 자체에 고정돼 있는 게 아니거든. 그래서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에 굶주려 있는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다녀야 함. 서로에게 가치를 더하는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임.  

‘계속 움직이라’는 조언이 상징하는 건 그거야. 억지로 몸 일으켜서 칼로리 소모해 지방 태우라는 말도 아니고, 돈 벌어서 사회적 쓸모 채워 넣으라는 것도 아님. 사람들이 그 말을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 말 자체가 순수하게 담고 있는 의미의 핵심은, 내 주변 환경을 조금이라도 계속 바꿔보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고, 조금이라도 더 자신감을 느끼는 ‘지점’을 찾아가라는 거임. 나와 환경의 관계가 꽤나 건설적이어지는 지점이 누구에게나 있음, 누구에게나.  

예를 들어 내 다리가 어느 틈새에 껴서 아픔. 거기서 빠져나오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음. 근데 “움직일 에너지가 없다”거나 "방법을 모른다"며 그냥 그 자리에 웅크리고만 있으면, 불쑥불쑥 올라오는 불안만 간신히 누르며 그 순간만 — 많은 사람들이 신경안정제 같은 약의 도움을 받으면서 — 버틸 뿐이고, 결국 나와 환경 사이의 ‘관계’는 절대 안 바뀜. 그러는 동안 몸도, 마음도 한껏 망가지겠지.

엉금엉금 흉하게 기어서라도 좋으니까, 나와 환경 사이의 관계에 야금야금 변화를 줘야 내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순간도 결국 찾아옴. 환경을 바꾸는 과정(기어서 빠져나오는 과정) 자체는 결코 우아하다거나, 상쾌하지는 않음. 

단순한 기능을 만드는 복잡한 회로    

사람은 잘 안 바뀜. 누군가의 말투, 행동, 말하는 방식—모두 그 사람 내면의 회로들이 아주 정교하게 얽혀서 만들어낸 거임. 그래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도 말투는 다 다르잖아. 누구는 말투에서 결단력이나 카리스마, 혹은 강요...? 같은 게 느껴지고, 누구는 어딘가 줏대 없어 보이고. 근데 그건 그냥 표면적인 게 아님. 그런 인상이 생기기까지의 배경, 즉 저마다 육체 안에 구성되어 있는 신경 회로들이 다 다른 거. 그 회로들의 모양새도, 그 회로를 흐르는 신호의 강도도, 전부. 내 눈에 보이는 누군가의 작은 특징 하나는, 사실 그 사람 내면을 꽉 채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신경 회로의 산물인 거임.   

어떤 ‘작은 특징’ 하나 바꾸려면 그거를 가능하게 한 내면 전체를 손봐야 함. 예를 들어 누가 “너는 왜 애가 그 모양이니?” 같은 말을 자주 한다고 치자. 그게 듣기 싫어서 “그 말 하지 마!”라고 해도, 그 말만 안 하게 일시적으로 억제를 하는 거지,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던 나머지 모든 사고 방식은 그대로거든. 마치 구조적으로 비가 샐 수밖에 없는 지붕에 나무 판자를 덧대 놓았다고 해도 계속 떨어지는 빗물에 누수는 다시 생길 수 있는 것처럼,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 구조의 결과인 현상은 재발되게 돼 있음. 

남자다운 사람한테 여성스럽게 말해보라든지, 깔끔한 사람한테 털털해지라고 하면 엄청 어색해하잖아. 그게 바로 그 말투나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회로 자체가 내면에 아직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임. 내면이 그대로인 채 겉만 바꾸면, 내외 불일치가 생기고, 그래서 부자연스러워지는 거임.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위치로 결국 되돌아가거든.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환경이라고 부를 수 있어. 이 사람은 이런 특징이 있네, 하면 그 사람도 나에게는 하나의 환경인 거야. 그래서 만약 나의 현재가 괴롭다면, 내 내면의 회로를 재구성해서 외부 자극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도록 대공사를 할 게 아니라면, 환경을 바꿔서 나와 세상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음, 아주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