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으로 ‘움직인다’는 건 되게 단순한 과정임. 뇌가 근육에 수축하라는 신호를 보내면, 근육이 수축하고, 근육과 연결된 힘줄이 뼈를 끌어당기면서 관절이 구부러지는 거임. 그게 겉보기엔 '움직이는 행위'로 보이는 거고.

근데 실제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저런 기계적인 메커니즘 이전에 몇 단계가 더 필요함. 바로 무의식적인 차원에서의 낙관의욕, 그리고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의도임. (여기서 무의식과 의식을 구분짓는 것은 말로 풀어낼 수 있냐 없냐의 차이임. "너 그렇게 한 의도가 뭐야?"에 대한 대답은 일정한 사고를 거쳐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낙관적이거나 아니거나, 의욕적이거나 아니거나는 사고를 통해 풀어내지는 게 아닌 하나의 상태에 불과함.) 

예를 들어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먼저 문을 열려고 하면 문은 (당연히) 열린다낙관이 있기 때문임. 이 낙관이 있어야 해보려는 의욕이 생기고, 그래야 문을 열겠다는 의도가 생기며, 결국 문고리를 잡는 행위로 이어지는 거임.

근데 우리는 하늘을 날겠다고 두 팔을 퍼덕이지는 않음. 왜냐면 그렇게 해봤자 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임(=비관). 안 될 걸 아니까 의욕도 없고, 그러니 의도도, 행위도 없음.

우울한 사람은 보통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경우가 많음. 근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님. 우울한 상태는 오히려 현실을 지나치게 정확히 보는 상태임. 다음 말이 충격일 수도 있지만, 사실임.

대부분 사람은 꿈이 있고, 그게 이루어질 거라고 대충 믿고 살아감. 근데 꿈이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음. 대신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얻게 되고, 그게 곧 삶의 성취가 됨. "본인이 의도한 건 그게 아니지만" 말임.

비관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함.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면 그건 애초에 의미가 없다고. 그래서 안 될 걸 너무 잘 아니까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음. 그러면 예상 밖의 선물도 없음. 그렇게 삶이 정체됨.

비관적인 시선이 틀렸다는 게 아님. 오히려 너무 정확함. 근데 세상이 우리가 예상 못한 방식으로 뭔가를 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함. 그게 문제임.

많은 사람들이 ‘행위’만 강조함. 나가서 운동하라, 사람 만나보라 이런 식으로. 근데 진짜 변화를 만드는 건 그 행위의 뿌리인 낙관임. 세게 말하자면, 비관은 똑똑함, 낙관은 일종의 멍청함에 가까움. 무언가를 일단 하게 만드는 멍청함. 그러니까 비관적인 사람들은 사실 덜 똑똑해야 하는 거임. 

낙관은 내가 놀 게임판을 만드는 작업

낙관을 방해하는 건 보통 “사람들이 날 싫어할 거야”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임. 근데 이런 생각들은 결국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서 오는 방어기제일 뿐임.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날 싫어할 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여야 그 위에 낙관도 쌓을 수 있음.

'내가 살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임. 죽는 사람이 살 가치가 없어서 죽고, 사는 사람이 살 가치가 있어서 사는 거 아님. 내가 죽어도 세상엔 아무 타격 없을 수도 있음. 살 가치가 정말 없을 수도 있음. 근데 중요한 건, 사는 이유가 '살 가치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거임. 우리는 탄생도 당했고, 삶도 당하고 있는 거임.

그렇다면 자살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선택이 성립이 되려면 결과를 직접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죽음은 경험할 수 없음. 죽는 순간 감각, 인지, 기억, 판단이 전부 사라지니까. 결국 죽음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선택 불가능한 영역임. 살까 말까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거임. 

삶은 그냥 내가 놀고 싶은 게임판을 만들어가는 과정임. 체스판을 하나하나 짜 맞추는 작업에 가까움. 그 작업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지만, 체스판이 일단 완성되고 나면 그제서야 시작되는 재미가 있음. 그 재미에 기대를 거는 마음이 바로 낙관임.

지금 이 웹사이트도 마찬가지였음. 처음엔 "안녕하세요" 한 줄 띄우는 것부터 시작함. 되게 초라한 노동이었음. 근데 글쓰기 편집창도 만들고, 다국어 기능도 넣고, 카테고리도 구성하면서 내 자신이 놀 판을 만든 거임. 그리고 이게 재밌어질 거라는 낙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낙관이 결국 지금의 행위로 이어진 거임.